장제 (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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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제는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로, 조조, 조비, 조예, 조방 네 황제를 섬기며 주요 보직을 역임했다. 합비 전투에서 손권을 속여 퇴각시키고, 관우의 번성 포위 당시 사마의와 함께 손권을 움직여 형주를 공격하게 하는 등 위나라의 주요 사건에 관여했다. 조비 시대에는 하후상의 권한 남용을 간언하고, 조예 시대에는 권력 집중을 경계하며, 요동 공격과 사치스러운 궁궐 건설에 반대하는 등 여러 차례 간언을 올렸다. 조상 제거 과정에서 사마의를 도왔으나, 조상 사후 며칠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강직한 성품과 뛰어난 인물 평가 능력을 지녔으나, 술을 좋아하고 인망이 부족하다는 평가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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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위의 태위 - 사마의
후한 말기부터 삼국 시대 위나라의 정치가이자 군사가였던 사마의는 조조, 조비, 조예 3대에 걸쳐 중용되며 위나라의 권력을 장악했으나, 고평릉의 변을 일으켜 정권을 찬탈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 조위의 태위 - 화흠
후한 말 혼란기에 여러 세력을 거쳐 조조에게 귀순하여 위나라 건국에 공헌, 삼공의 지위에 오른 화흠은 청빈한 삶을 살았다는 평가와 폭거를 저질렀다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 249년 사망 - 왕필
왕필은 삼국시대 위나라의 관료이자 현학 연구가로, 『노자』와 『주역』에 대한 주석을 통해 중국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하안의 사상을 비판하며 자신만의 철학적 견해를 드러냈고, 젊은 나이에 요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 249년 사망 - 하안
하안은 삼국 시대 위나라의 학자이자 현학의 창시자이며 조조의 양자로 조비, 조예와 함께 자랐고, 조조의 딸과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으나 사마의의 고평릉의 변으로 처형되었으며, 유교와 도교를 융합하려는 시도를 했다. - 조조 휘하의 정치인 - 동소
동소는 후한 말부터 위나라 초까지 활동한 정치가이자 책사로서, 원소 휘하에서 활동하다 조조에게 천거된 후 헌제 천도, 관도대전, 오환 정벌 등 중요한 사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위나라 건국과 안정에 공헌했다. - 조조 휘하의 정치인 - 사마의
후한 말기부터 삼국 시대 위나라의 정치가이자 군사가였던 사마의는 조조, 조비, 조예 3대에 걸쳐 중용되며 위나라의 권력을 장악했으나, 고평릉의 변을 일으켜 정권을 찬탈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장제 (조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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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장제 |
원어 이름 | 蔣濟 |
로마자 표기 | Jiǎng Jì |
자 | 자통(子通) |
시호 | 경후(景侯) |
생애 | |
출생 | 미상 |
출생지 | 안후이성화이안시 |
사망일 | 249년 5월 18일 |
사망지 | 뤄양시 |
사인 | 병사 |
배우자 | 미상 |
자녀 | 장수 최소 1명 이상의 아들 |
관직 정보 | |
작위 | 도향후(都鄉侯) |
최종 관직 | 태위(太尉) |
임관 시작 | 242년 9월 1일 |
임관 종료 | 249년 5월 18일 |
이전 관직 | 만총 |
후임 관직 | 왕릉 |
주요 경력 | 상국장사(相國長史): 220년 3월 15일 ~ 220년 12월 11일 동중랑장(東中郎將): 220년 ~ 미상 상서(尚書): 223년 ~ 228년 호군장군(護軍將軍): 미상 중호군(中護軍): 228년 ~ 미상 산기상시(散騎常侍): 미상 영군장군(領軍將軍): 239년 ~ 242년 9월 1일 |
섬긴 군주 | |
군주 | 조조 조비 조예 조방 |
2. 생애
208년 손권(孫權)은 적벽에서 승리하고 강릉(江陵)을 점령한 여세를 몰아 그 해 12월 합비를 포위하였다. 장제는 조조가 4만 병사를 원군으로 보낸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합비성에 사자 세 명을 보냈는데 그중 둘이 붙잡혔다. 편지의 내용을 그대로 믿은 손권은 황급히 퇴각하였다.[102]
209년 조조(曹操)는 손권의 공격에 대비해 회남의 백성들을 이주시킬 생각을 하고 당시 양주별가(揚州別駕)였던 장제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장제는 조조의 계획에 반대했으나 조조는 듣지 않고 계획대로 실행하려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백성들이 무척 불안해 하여 장강을 건너 손권에게로 가 버렸기 때문에 환성(皖城)을 제외한 주변 지역이 텅 비게 되었다. 조조는 무안해 하면서 장제를 단양(丹陽) 태수로 임명했다.
219년 관우(關羽)가 우금(于禁)과 방덕(龐德)을 격파하고 조인(曹仁)이 지키는 번성(樊城)을 포위하자, 조조는 관우를 두려워해 허도로 천도를 고려하였다. 이때 장제는 사마의(司馬懿)와 함께 손권을 움직여 관우를 공격할 것을 청하였고, 이후에 손권이 형주를 공격했기 때문에 번성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220년 조비(曹丕)가 헌제(獻帝)에게서 선양을 받고 위나라를 세운 후 장제를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임명했다. 조비가 하후상(夏侯尙)에게 사람들을 마음대로 다룰 권한을 주자 장제는 조비에게 간언하여 이를 거둬들이게 하였다. 이후 상서(尙書)가 되었다.
222년 위나라에서는 유비(劉備)와 육손(陸遜)이 싸우느라 오나라에서 제대로 방어하지 못할 것으로 여기고 조인과 함께 강릉을 공격하게 했다. 오나라의 장수 주환(朱桓)이 일부러 중주(中州)[103]의 방어를 허술하게 보이게 하며 조인을 유인하려 들었다. 조인이 중주를 공격하려 하자 장제는 반대했으나 끝내 공격이 실행되었고, 조인은 주환에게 패하여 퇴각하였다. 얼마 가지 않아 조인이 죽자, 조비는 장제를 동중랑장으로 임명하였다[104].
228년 오나라에서는 주방(周魴)을 거짓 항복시키고 조휴(曹休)를 유인하려 했다. 장제와 만총(滿寵)은 위군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고 보았으며, 조휴는 끝내 오군에게 대패하였다. 이후 중호군(中護軍)으로 승진했다. 당시의 황제 조예(曹叡)가 유방(劉放)과 손자(孫資)에게 전권을 맡기자 장제는 글을 올려 이에 대해 간언하였다. 조예는 장제의 충언을 받아들이고 호군장군(護軍將軍) 겸 산기상시로 삼았다[105].
232년 요동에서 할거하고 있던 공손연(公孫淵)은 위나라에게서 요동 태수로 임명되었지만 바닷길로 오나라에 사자를 보내 두 나라와 모두 외교관계를 맺으려 하였다. 유주자사 왕웅(王雄)이 공손연을 공격하게 해 달라고 청하자, 장제가 이를 반대했으나 조예는 왕웅에게 요동을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위군은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철수했다.
237년 조예가 사치에 빠져 대대적으로 궁궐 전각을 세웠기 때문에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조예에게 간언하는 상소를 올렸다. 238년 공손연이 연(燕)나라를 세우고 공공연히 위나라에 반기를 들자 조예는 사마의로 하여금 토벌하게 했다. 이때 조예는 장제에게 오나라가 공손연을 구원할지를 물으니, 장제는 아직 알 수 없다고 답하였다. 조예가 죽고 조방(曹芳)이 즉위한 후 영군장군(領軍將軍)에 임명되었고 창릉정후(昌陵亭侯)에 봉해졌다.
242년 만총(滿寵)이 죽자, 태위(大尉)가 되었다.
당시 대장군 조상(曹爽)이 정권을 잡았고 그 심복인 하안이 자주 법규를 고치자, 이를 중지하게 할 것을 간언하였다. 249년 사마의가 조상을 제거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낙양을 장악했을 때, 조상의 부하인 환범(桓範)은 별다른 대우를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상에게 가기 위해 낙양성을 빠져나갔다. 장제는 사마의에게 조상이 환범을 제대로 다루지 못할 것이라 예측했고, 그 말대로 조상은 환범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다가 사마의에게 항복하였다.
조상이 정변 때문에 낙양성 밖에서 머물고 있을 때, 장제는 조상에게 편지를 보내 사마의가 조상을 면직시키려 할 뿐이라고 전하여 조상이 낙양으로 오게 했다. 그러나 사마의가 조상을 죽이자 장제는 몹시 괴로워하였다. 조상을 제압한 공으로 도향후(都鄕侯)에 봉해지자 장제는 이를 사양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로 인해 병이 생겨 며칠을 가지 못하고 4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2. 1. 초기 생애와 경력
장제는 현재의 안후이성, 화이안시 북쪽에 위치한 양주 초국(楚國) 평아현(平阿縣) 출신이다.[2] 지역 군 관청에서 회계 담당으로 경력을 시작하여, 이후 주(州)급 시중으로 승진했다.[3]건안 13년(208년), 양주의 합비가 손권에게 포위되었을 때, 장제는 조조가 보낸 원군이 도착한 것처럼 위장하여 손권을 속여 퇴각하게 만들었다.[102] 이듬해인 209년 조조가 회남의 백성들을 이주시키려 하자 장제는 반대했으나, 조조는 계획을 강행했고, 백성들은 장강을 건너 손권에게 가버렸다.
219년 관우가 번성을 포위하자, 장제는 사마의와 함께 손권을 움직여 관우를 공격할 것을 청했고, 이후 손권이 형주를 공격하여 번성은 위기에서 벗어났다.
220년 조비가 헌제에게서 선양을 받고 위나라를 세운 후, 장제는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임명되었다. 조비가 하후상에게 사람들을 마음대로 다룰 권한을 주자, 장제는 조비에게 간언하여 이를 거둬들이게 하였다. 이후 상서(尙書)가 되었다.
222년 조인이 주환에게 패배한 후, 조비는 장제를 동중랑장(東中郞將)으로 임명하였다.[104] 228년 조휴가 오나라에 대패한 후에는 중호군(中護軍)으로 승진했다. 당시 황제 조예가 유방과 손자에게 전권을 맡기자, 장제는 글을 올려 이에 대해 간언하였다. 조예는 장제의 충언을 받아들여 호군장군(護軍將軍) 겸 산기상시로 삼았다.[105]
232년 요동의 공손연이 위나라와 오나라 사이에서 외교 관계를 맺으려 하자, 장제는 유주자사 왕웅(王雄)의 공손연 공격에 반대했으나, 조예는 공격을 강행했고, 위군은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237년 조예가 사치에 빠져 궁궐 전각을 세우자, 장제는 백성들의 원성을 언급하며 간언하는 상소를 올렸다. 238년 공손연이 연(燕)나라를 세우고 반기를 들자, 조예는 장제에게 오나라의 공손연 구원 여부를 물었고, 장제는 알 수 없다고 답하였다. 조예 사후 조방이 즉위하자 영군장군(領軍將軍)에 임명되었고 창릉정후(昌陵亭侯)에 봉해졌다.
242년 만총이 죽자 태위(大尉)가 되었다.
2. 2. 조조 휘하에서의 활약
208년 손권(孫權)은 적벽에서 승리하고 강릉(江陵)을 점령한 여세를 몰아 그 해 12월 합비를 포위하였다. 장제는 조조가 4만 병사를 원군으로 보낸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합비성에 사자 세 명을 보냈는데 그중 둘이 붙잡혔다. 편지의 내용을 그대로 믿은 손권은 황급히 퇴각하였다.[102]209년 조조(曹操)는 손권의 공격에 대비해 회남의 백성들을 이주시킬 생각을 하고 당시 양주별가(揚州別駕)였던 장제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장제는 조조의 계획에 반대했으나 조조는 듣지 않고 계획대로 실행하려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백성들이 무척 불안해 하여 장강을 건너 손권에게로 가 버렸기 때문에 환성(皖城)을 제외한 주변 지역이 텅 비게 되었다. 조조는 무안해 하면서 장제를 단양(丹陽) 태수로 임명했다.
219년 관우(關羽)가 우금(于禁)과 방덕(龐德)을 격파하고 조인(曹仁)이 지키는 번성(樊城)을 포위하자, 조조는 관우를 두려워해 허도로 천도를 고려하였다. 이때 장제는 사마의(司馬懿)와 함께 손권을 움직여 관우를 공격할 것을 청하였고, 이후에 손권이 형주를 공격했기 때문에 번성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2. 2. 1. 합비 전투
208년 손권(孫權)은 적벽에서 승리하고 강릉(江陵)을 점령한 여세를 몰아 그 해 12월 합비를 포위하였다. 장제는 조조가 4만 병사를 원군으로 보낸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합비성에 사자 세 명을 보냈는데 그중 둘이 붙잡혔다. 편지의 내용을 그대로 믿은 손권은 황급히 퇴각하였다.[6][7] 이는 208년 합비 전투의 일부였다.2. 2. 2. 백성 강제 이주 반대
209년 조조(曹操)는 손권의 공격에 대비해 회남의 백성들을 이주시킬 생각을 하고 당시 양주별가(揚州別駕)였던 장제에게 자문을 구하였다.[8] 장제는 조조의 계획에 반대했다.[9]장제는 "그때는 폐하께서 약하셨고 적은 강했습니다. 만약 그 백성들을 이주시키지 않으셨다면, 그들을 적에게 빼앗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원소를 격파하시고, 북쪽의 백랑산 전투에서 유성을 정복하셨으며, 남쪽으로 장강과 한수 그리고 형주로 진격하시니, 한 제국은 폐하의 위엄에 떨고 백성들은 더 이상 폐하께 대항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백성들은 자기 집에 대한 애착이 강하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들을 강제로 이주시킨다면, 그들은 두려움과 불안감을 느낄 것입니다."라고 조조에게 간언을 하였다.[9]
하지만 조조는 장제의 조언을 무시하고 회남의 백성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려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백성들이 무척 불안해 하여 장강을 건너 손권에게로 가 버렸기 때문에 환성(皖城)을 제외한 주변 지역이 텅 비게 되었다. 장제의 예상대로 10만 명이 넘는 회남의 백성들이 장강을 건너 남쪽으로 도망쳐 강동에 정착했다.[10] 조조는 무안해 하면서 장제를 단양(丹陽) 태수로 임명했다.
몇 년 후, 장제가 예현 (현재의 허베이성, 한단시)에서 조조를 방문했을 때, 조조는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나는 저 백성들을 적에게서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 했지만, 결국 그들을 도망가게 만들었소."[11]
2. 2. 3. 번성 전투
219년, 유비 휘하의 장수 관우는 군대를 이끌고 조조의 장수 조인이 지키고 있던 번성(樊城, 현재의 후베이성, 샹양시, 판청 구)을 공격했다. 조조는 우금을 보내 조인을 도우려 했지만, 홍수로 인해 증원군은 전멸했고, 우금은 관우에게 항복했다.[17]장제와 사마의는 조조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우금의 패배는 우리 방어의 결함 때문이 아니며,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도 않을 것입니다. 황도를 옮기는 것은 적에게 우리의 약점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는 회하와 면강 주변 지역에 공황을 일으킬 것입니다. 손권과 유비는 서로 가까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를 믿지 않습니다. 손권은 관우의 승리를 보고 매우 불안해할 것이므로, 우리는 그를 부추겨 관우의 근거지인 형주를 공격하게 해야 합니다. 이는 번성에 대한 포위를 풀게 할 것입니다."[18][19]
조조는 장제와 사마의의 조언을 따랐다. 219년 겨울, 손권은 그의 장수 여몽에게 군대를 이끌고 유비의 형주 영토의 주요 거점인 공안현과 강릉현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여몽의 침공에 기습당한 관우는 형주에서 유비의 모든 영토를 잃었다. 그는 결국 매복에 걸려 손권의 군대에 의해 사로잡혀 처형당했다.[20][21]
2. 3. 조비 시대의 활동
조비(曹丕)가 하후상(夏侯尙)에게 사람들을 마음대로 다룰 권한을 주자 장제는 조비에게 간언하여 이를 거둬들이게 하였다.222년 위나라에서는 유비(劉備)와 육손(陸遜)이 싸우느라 오나라에서 제대로 방어하지 못할 것으로 여기고 조인과 함께 강릉을 공격하게 했다. 오나라의 장수 주환(朱桓)이 일부러 중주(中州)의 방어를 허술하게 보이게 하며 조인을 유인하려 들었다. 조인이 중주를 공격하려 하자 장제는 반대했으나 끝내 공격이 실행되었고, 조인은 주환에게 패하여 퇴각하였다. 얼마 가지 않아 조인이 죽자, 조비는 장제를 동중랑장으로 임명하였다.
2. 3. 1. 하후상 견제
조비(曹丕)가 하후상(夏侯尙)에게 사람들을 마음대로 다룰 권한을 주자 장제는 조비에게 간언하여 이를 거둬들이게 하였다.[104]2. 3. 2. 조인의 군사 작전 비판
222년 위나라에서는 유비(劉備)와 육손(陸遜)이 싸우느라 오나라에서 제대로 방어하지 못할 것으로 여기고 조인과 함께 강릉을 공격하게 했다. 오나라의 장수 주환(朱桓)이 일부러 중주(中州)[103]의 방어를 허술하게 보이게 하며 조인을 유인하려 들었다. 조인이 중주를 공격하려 하자 장제는 반대했으나 끝내 공격이 실행되었고, 조인은 주환에게 패하여 퇴각하였다.[31][32] 얼마 가지 않아 조인이 죽자, 조비는 장제를 동중랑장(東中郞將)으로 임명하였다[104].[33] 조비는 장제에게 조서를 내려, "그대는 문무에 능통하며 충성심과 열정을 가지고 있다. 내가 알기로는 그대에게 강을 건너 오나라를 정복하려는 야망이 있기에, 이 자리에 군사 지휘를 맡긴다."라고 칭찬했다.[34]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장제는 동중랑장에서 해임되었고, 상서(尙書)로 임명되어 황실 비서실에서 근무하게 되었다.[35]2. 4. 조예 시대의 간언
220년 조비(曹丕)가 헌제에게서 선양을 받고 위나라를 세운 후 장제를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임명했다. 조비가 하후상(夏侯尙)에게 사람들을 마음대로 다룰 권한을 주자 장제는 조비에게 간언하여 이를 거둬들이게 하였다. 이후 상서(尙書)가 되었다.228년 황제 조예(曹叡)가 유방과 손자에게 전권을 맡기자 장제는 글을 올려 이에 대해 간언하였다. 조예는 장제의 충언을 받아들이고 호군장군(護軍將軍) 겸 산기상시로 삼았다.
249년 사마의가 조상을 제거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낙양을 장악했을 때, 장제는 조상이 환범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아 사마의에게 항복할 것이라 예측했다. 조상이 정변 때문에 낙양성 밖에서 머물고 있을 때, 장제는 조상에게 편지를 보내 사마의가 조상을 면직시키려 할 뿐이라고 전하여 조상이 낙양으로 오게 했다. 그러나 사마의가 조상을 죽이자 장제는 몹시 괴로워하였다.
232년 공손연(公孫淵)은 위나라에게서 요동 태수로 임명되었지만 바닷길로 오나라에 사자를 보내 두 나라와 모두 외교관계를 맺으려 하였다. 유주자사 왕웅(王雄)이 공손연을 공격하게 해 달라고 청하자, 장제가 이를 반대했으나 조예는 왕웅에게 요동을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위군은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철수했다.
237년 조예가 사치에 빠져 대대적으로 궁궐 전각을 세웠기 때문에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조예에게 간언하는 상소를 올렸다.
2. 4. 1. 권력 집중 견제
220년 조비(曹丕)가 헌제에게서 선양을 받고 위나라를 세운 후 장제를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임명했다. 조비가 하후상(夏侯尙)에게 사람들을 마음대로 다룰 권한을 주자 장제는 조비에게 간언하여 이를 거둬들이게 하였다. 이후 상서(尙書)가 되었다.[104]228년 황제 조예(曹叡)가 유방(劉放)과 손자(孫資)에게 전권을 맡기자 장제는 글을 올려 이에 대해 간언하였다. 장제는 황궁에서 핵심적인 두 보직 - 중서령(中書令)과 중서감(中書監) - 을 맡은 관료들이 지나치게 많은 권력을 휘두른다고 판단하여 조예에게 상소를 올렸다.[47]
이에 조예는 장제에게 칙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군주는 강한 인품의 신하에게 의존한다. (장)제는 문무 양쪽에 능통하며, 그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한다. 그는 주요 문제에 대해 논의할 때마다 상소를 올리거나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나는 그의 진취성과 충성심에 매우 감명받았다."[55] 그 후 조예는 장제를 호군장군(護軍將軍)으로 승진시키고 산기상시(散騎常侍)의 직책을 추가로 수여했다.[56]
249년 사마의가 조상을 제거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낙양을 장악했을 때, 장제는 조상이 환범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아 사마의에게 항복할 것이라 예측했다. 조상이 정변 때문에 낙양성 밖에서 머물고 있을 때, 장제는 조상에게 편지를 보내 사마의가 조상을 면직시키려 할 뿐이라고 전하여 조상이 낙양으로 오게 했다. 그러나 사마의가 조상을 죽이자 장제는 몹시 괴로워하였다.
2. 4. 2. 요동 공격 반대
232년, 조예는 유주자사 왕웅(王雄)에게 군대를 이끌고 당시 조위의 제후였던 군벌 공손연이 통치하고 있던 요동을 공격하게 하려 했다. 왕웅은 해로를 통해 요동을 공격할 예정이었다.[57]장제는 이 소식을 듣고, 조예에게 요동 공격을 만류하는 상소를 올렸다. 장제는 "군주는 적대적이지 않은 외적이나 배반하지 않은 제후를 공격하는 데 너무 열을 올려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들을 격파하지 못한다면, 그들을 억지로 자신에게 반항하게 만들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요동 사람들은 대대로 당신에게 충성을 다해왔고, 매년 조공을 바쳐왔습니다. 비록 요동을 정복하여 그 백성과 재물을 얻는다고 해도, 얻는 것은 매우 미미하여 당신에게 큰 이득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요동을 정복하는 데 실패한다면, 그들의 신뢰를 잃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적으로 만들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58]
조예는 장제의 충고를 무시하고 왕웅에게 요동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왕웅과 그의 군대는 원정에서 아무런 성과 없이 철수했다.[59]
2. 4. 3. 궁궐 건설 비판
237년, 조예가 사치에 빠져 대대적으로 궁궐 전각을 세웠기 때문에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장제는 조예에게 간언하는 상소를 올렸다.[60]장제는 상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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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는 선대들이 이룩한 진전을 이어받아 그들의 영광스러운 유산을 확대해야 합니다. 지금은 긴장을 풀고 평화로운 시대처럼 제국을 다스릴 때가 아닙니다. 제국은 12개의 주를 아우르고 있지만, 전체 인구는 한나라의 단일 군의 인구보다 적습니다. 우리의 두 라이벌 국가는 아직 정복되지 않았고, 우리의 군인들은 여전히 국경을 지키며 농사를 짓거나 싸움에 시간을 보냅니다. 이로 인해 대중의 불만이 널리 퍼졌습니다.[61] 황궁과 종묘가 아직 완전히 건설되지 않았지만,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너무 적고, 먹고 입을 것이 충분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의 급선무는 백성들로부터 에너지와 자원을 빼앗는 것을 멈추고, 백성들이 휴식을 취하고 회복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수십만 명의 굶주리고 지친 사람들이 자연 재해를 만나면 더 이상 권위에 복종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기회를 가질 때 식량을 재배하고 비축할 기회를 빼앗아서는 안 됩니다.[62] 강해지기를 원하는 통치자는 백성의 강점과 약점을 신중하게 평가하고, 그들의 빈곤, 고통, 고난을 덜어주어야 합니다. 과거 구천은 백성들에게 인구를 늘려 미래에 사용하도록 장려했고, 연 소왕은 질병으로 죽은 백성들에게 연민을 보여주었고, 나중에 그들이 치욕을 갚도록 돕는 데서 그들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것이 연과 같은 약한 국가가 제와 같은 더 강력한 국가를 격파할 수 있었던 이유이며, 약한 월이 더 강력한 라이벌 오를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지금 당장, 우리의 두 라이벌 국가를 공격하지 않으면 그들을 멸망시킬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굴복하고 싶지 않다면, 그들을 공격해야 합니다. 아직 살아 있을 때 그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미래 세대가 폐하를 책임지게 될 것입니다.[63] 폐하께서 지혜와 지능을 잘 활용하시고, 당분간 중요하지 않은 문제들을 제쳐두고 오로지 라이벌 국가를 제거하는 데 집중하신다면, 저는 폐하께 어려운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감각적인 쾌락에 빠지는 것은 사람의 에너지를 소모시킬 뿐입니다. 에너지를 계속 잃으면 약해지고 쇠약해지며, 결국 건강과 웰빙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폐하께서 폐하 자신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에게도 이익이 되는 일을 선택하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덜 중요한 모든 문제에 대해서는, 저는 폐하께서 당분간 그것들을 제쳐두고 무시하여 정신을 날카롭게 유지하고 집중하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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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조예는 장제에게 조서를 내려 "만약 내가 당신, 즉 호군 장군이 없다면, 나는 그런 조언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답했다.[65]
2. 5. 조방 시대와 죽음
239년 1월, 조예가 죽자, 그의 양자 조방이 위나라의 다음 황제로 즉위했다. 조방은 즉위 후 장제를 군을 이끄는 장군(영군장군)으로 재임명하고, 창릉정후에 봉했다. 242년 만총이 죽자, 장제는 태위(大尉)가 되었다.[69]당시 대장군 조상이 정권을 잡았고 그 심복인 하안이 자주 법규를 고치자, 장제는 이를 중지하게 할 것을 간언하였다.
249년 사마의가 조상을 제거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낙양을 장악했을 때, 조상의 부하인 환범은 별다른 대우를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상에게 가기 위해 낙양성을 빠져나갔다. 장제는 사마의에게 조상이 환범을 제대로 다루지 못할 것이라 예측했고, 그 말대로 조상은 환범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다가 사마의에게 항복하였다.
조상이 정변 때문에 낙양성 밖에서 머물고 있을 때, 장제는 조상에게 편지를 보내 사마의가 조상을 면직시키려 할 뿐이라고 전하여 조상이 낙양으로 오게 했다. 그러나 사마의가 조상을 죽이자 장제는 몹시 괴로워하였다. 조상을 제압한 공으로 도향후에 봉해지자 장제는 이를 사양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로 인해 병이 생겨 며칠을 가지 못하고 4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세어》에 따르면, 장제는 조상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투항을 권유했기 때문에, 조상이 사마의에게 죽임을 당하자, 조상을 배신한 것을 마음에 두고, 같은 해 안에 곧 사망했다고 한다. 시호는 '''경후'''.
2. 5. 1. 조상 견제와 고평릉 사변 가담
242년 만총이 죽자, 장제는 태위(大尉)가 되었다.[76]당시 대장군 조상이 정권을 잡았고 그 심복인 하안이 자주 법규를 고치자, 장제는 이를 중지하게 할 것을 간언하였다.[76]
일식이 발생하자 조방은 모든 관료들을 소집하여 그것이 불길한 징조인지 질문했다. 장제는 상소문에서 "지금 우리 두 경쟁국( 촉과 오)은 아직 정복되지 않았고, 우리의 군인들은 10년 넘게 전장에 나가 있다. 남녀 모두 매우 원망하고 백성들은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훌륭한 인재에게 국가 법률 체계 설계와 수립을 맡겨야지, 하찮은 관리들이 마음대로 법을 바꾸는 것은 국가와 백성에게 해를 끼친다고 주장했다.[78][79][80]
249년 사마의가 조상을 제거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낙양을 장악했을 때, 조상의 부하인 환범은 별다른 대우를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상에게 가기 위해 낙양성을 빠져나갔다. 장제는 사마의에게 조상이 환범을 제대로 다루지 못할 것이라 예측했고, 그 말대로 조상은 환범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다가 사마의에게 항복하였다.[81]
조상이 정변 때문에 낙양성 밖에서 머물고 있을 때, 장제는 조상에게 편지를 보내 사마의가 조상을 면직시키려 할 뿐이라고 전하여 조상이 낙양으로 오게 했다. 그러나 사마의가 조상을 죽이자 장제는 몹시 괴로워하였다.[82] 조상을 제압한 공으로 도향후(都鄕侯)에 봉해지자 장제는 이를 사양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로 인해 병이 생겨 며칠을 가지 못하고 4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2. 5. 2. 죽음
249년 사마의가 조상을 제거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낙양을 장악했을 때, 조상의 부하인 환범은 별다른 대우를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상에게 가기 위해 낙양성을 빠져나갔다. 장제는 사마의에게 조상이 환범을 제대로 다루지 못할 것이라 예측했고, 그 말대로 조상은 환범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다가 사마의에게 항복하였다.[84]조상이 정변 때문에 낙양성 밖에서 머물고 있을 때, 장제는 조상에게 편지를 보내 사마의가 조상을 면직시키려 할 뿐이라고 전하여 조상이 낙양으로 오게 했다. 그러나 사마의가 조상을 죽이자 장제는 몹시 괴로워하였다. 조상을 제압한 공으로 도향후(都鄕侯)에 봉해지자 장제는 이를 사양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로 인해 병이 생겨 며칠을 가지 못하고 4월 19일 세상을 떠났다.[83]
조방은 장제에게 촌후 작위에서 도향후(都鄕侯)로 승진시키고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700가구를 영지로 하사하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장제는 이 영예를 거절하였다.[85] 진나라의 역사가 손성은 장제가 이 영예를 거절하며 훌륭한 양심을 보여준 것을 칭찬했다.[86]
장제는 249년 5월 18일에 사망했으며 시호 "경후"(景侯)로 추존되었다.[87]
《세어》(世語)에는 고평릉의 변 당시 장제가 조상에게 서신을 보내 사마의가 단지 그가 섭정으로서의 권력을 포기하기만을 원한다고 약속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상이 몰락하여 처형된 후, 장제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매우 괴로워하며 병이 들어 약 3개월 후에 사망했다.[88]
3. 평가
장제는 '강골한'으로 불렸으며, 만년의 명제에게 "장제가 없었다면 이런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게 할 정도의 성격이었다. 인물 보는 안목 또한 뛰어났고 종회의 뛰어난 재능을 일찍이 간파했다. 저술에도 능해, 『만기론』・『삼주론』 등 다수의 작품을 저술했다.
사마의와 친한 사이였으며, 정사에도 그와 사마의의 대화가 적혀 있는 것이 적지 않다. 조상 아래에 환범이 도망쳤을 때 "조상은 환범을 쓸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고, 결국 그 말대로 되었다. 또한, 왕릉의 아들인 왕광의 재능을 사마의 앞에서 칭찬하며, 후에 왕릉 일문을 멸망시킬지도 모른다고 후회한 이야기도 있다.
한편, 장제는 술을 매우 좋아해, 술에 취해 난폭하게 행동하거나 면회를 요청한 자를 능숙하게 돌려보내는 등의 일면이 있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인망이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장제가 양주의 보좌관이었을 때, 수춘 현령이었던 시묘가 찾아왔으나, 장제는 만취하여 면회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시묘를 문전박대했다. 격노한 시묘는 '''주도 장제'''(술꾼 장제)라고 적은 나무 인형을 만들어 활로 쏘는 것을 일과로 삼았으나, 장제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상림전이 인용하는 『위략』청개전에서)
3. 1. 긍정적 평가
장제는 '강골한'으로 불렸으며, 만년의 명제에게 "장제가 없었다면 이런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게 할 정도의 성격이었다. 인물 보는 안목 또한 뛰어났고 종회의 뛰어난 재능을 일찍이 간파했다. 저술에도 능해, 『만기론』・『삼주론』 등 다수의 작품을 저술했다.사마의와 친한 사이였으며, 정사에도 그와 사마의의 대화가 적혀 있는 것이 적지 않다. 조상 아래에 환범이 도망쳤을 때 "조상은 환범을 쓸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고, 결국 그 말대로 되었다. 또한, 왕릉의 아들인 왕광의 재능을 사마의 앞에서 칭찬하며, 후에 왕릉 일문을 멸망시킬지도 모른다고 후회한 이야기도 있다.
3. 2. 부정적 평가
장제는 술을 매우 좋아해, 술에 취해 난폭하게 행동하거나 면회를 요청한 자를 능숙하게 돌려보내는 등의 일면이 있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인망이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장제가 양주의 보좌관이었을 때, 수춘 현령이었던 시묘가 찾아왔으나, 장제는 만취하여 면회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시묘를 문전박대했다. 격노한 시묘는 '''주도 장제'''(술꾼 장제)라고 적은 나무 인형을 만들어 활로 쏘는 것을 일과로 삼았으나, 장제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상림전이 인용하는 『위략』청개전에서)
4. 한국과의 관계
4. 1. 요동 문제에 대한 현실적 조언
238년, 공손연은 조예가 자신을 공격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동오의 황제 손권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요동반도로 원군을 보내 자신을 돕도록 요청했다.[66] 조예는 이 소식을 듣고 장제에게 "손권이 요동으로 군대를 보낼 것 같소?"라고 물었다.[67]장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손권은 우리의 방어가 튼튼하여 어떤 이점도 얻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적의 영토 깊숙이 군대를 보내는 것은 지속 가능한 작전이 아니며, 주변부만 공격하는 것은 인력과 자원의 낭비일 뿐입니다. 손권은 아들과 형제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도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이전에 그를 굴욕스럽게 만든 먼 동맹국을 신경 쓰겠습니까? 그가 공손연에게 원조를 보낼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는 이유는 우리를 혼란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는 우리가 공손연을 격파하지 못할 경우에만 행동을 취할 것입니다. 우리는 요동과 육지와 물로 분리되어 있으므로, 요동을 공격한다면 신속하게 정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손권이 경무장 부대를 보내 우리 국경을 소규모로 공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경계해야 할 점입니다."[68]
5. 참고 문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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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蒋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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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寿「三国志」[[ちくま学芸文庫]]版3巻P65~80。[[程昱]]・[[郭嘉]]・[[董昭]]・[[劉曄]]・[[劉放]]との合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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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三國志/卷14#蔣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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